평생 집 한칸 없이 독립·사회운동 몸 바친 ‘영원한 청년’

평생 집 한칸 없이 독립·사회운동 몸 바친 ‘영원한 청년’

평생 집 한칸 없이 독립·사회운동 몸 바친 ‘영원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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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18〉 월남 이상재 민중과 함께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한 영원한 청년, 겨레의 스승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萬事無求源理外 一心自在不言中 온갖 일 원리 밖에서 찾지 마시오 한 마음 말 않는 속에 절로 있나니 (이상재 선생 시)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은 1850년 충남 서천 한산면에서 목은 이색의 후예 이희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모시와 소곡주로 알려진 한산 관아에서 토목·영선을 맡아보던 종9품 임시직인 가감역을 지냈다. 어려서 서당에서 공부하다 공주 마곡사의 혜산 스님에 사사하고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1867년 시험 부패현장에 낙담하고 서울로 가서 온건 개화파인 박정양의 문하생이 되어 개인 비서로둘째자녀교육비
그 집에서 13년 간을 보내면서 신지식을 접하고 국내외 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우게 된다. 1881년 조선 정부가 비밀리에 조사시찰단(일명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면서 박정양은 12명의 암행어사 중 한 명에 임명되었고 선생도 수행원으로 동행하게 된다. 수차례 옥고, 이승만 등과 ‘감옥학교’ 열기도 plamed korea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한 영원한 청년, 이상재 선생 초상. [사진 독립기념관] 대출 고정금리 변동금리
선생은 개화파 인사들로부터 인정받으며 1884년 우정국이 개설되자 인천분국장에 임명되었으나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하자 자진 사퇴하고 낙향한다. 1887년 고종은 자주독립 외교의 일환으로 박정양이 최초의 외국 주재 공사인 주미 공사로 부임하새마을금고 합격자소서
도록 했고, 선생은 외교서기관으로 임명되어 1년여 동안 워싱턴DC에서 근무했다.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일행은 철수하게 되나 선생은 미국에서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박정양은 청나라의 압력으로 파직당한 후 고종에게 귀국보고를 했고 고종은 배석했던 선생에게 지방관직을 제의했으나 공사의 처지를 들어 사양했다. 부동산정보센터
선생은 1894년 갑오개혁 직전부터 국정의 요직을 맡아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관이 되었고 박정양이 학부대신이 되자 학부아문 참의 겸 학무국장을 지냈다. 부친의 별세로 관직을 내려놓았으나 이듬해 다시 학부 및 법부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내정개혁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선생은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고 통상을 확대하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받으려는 개20대 사장
화파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으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일본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된다. 민비 시해 후 고종이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박정양이 다시 중용되고 선생은 내각총서와 중추원 일등의관, 이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맡아 탐관오리 축출과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목숨을 건 충언과 직설로 임금을 보필했다. 선생은 각국 외교미국모기지시장
사절단의 친목모임인 정동구락부에 참가하면서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기르게 되었고 의정부 내각총서 직위에 있으면서도 서재필,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개혁운동에 나섰다.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서 조정의 시책들을 비판하고 외세 배척과 황권 확립을 위한 상소문도 제출했다. 농협종합통장
관복을 입은 청년 시절의 이상재 선생.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새마을금고기업인터넷뱅킹
그해 반개혁 세력이 득세하면서 선생을 비롯한 독립협회 인사들이 체포되었고 이승만이 경무청 앞에서 석방을 주장하는 철야시위를 주도하면서 이들은 석방되었다. 정부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선생은 5년 남짓한 관료 활동을 끝내고 낙향한다. 그러나 독립협회 활동은 선생의 사상적 전환과 한평생 재야 시민운동에 몸을 던지는 계빅토리아시크릿뉴욕
기가 되었다. 선생이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해온 데 대해 수구파 친러 세력은 1902년 선생과 아들 승인, 그리고 관련인사들을 체포하고 ‘개혁당 사건’을 조작한다. 공화정부를 수립하려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으로, 선생은 두 달여의 모진 고문 끝에 국사범으로 15년형을 언도받고 한성감옥소에 투옥되었다. 선생은 감옥에서 이승만 등 평생의 동지를 만나게 된다. 이승만은 1899년 고종폐위 음모 가담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탈옥 시도 후 종신형을 받아 수감돼 있었다. 선생은 감옥에서 이승만·박용만·신흥우 등과 함께 ‘감옥학교’를 열어 죄수와 간수들을 모아 한글·한문·영어·성경 등을 가르쳤다. 당시 배재학당 학장 D 벙커를 비롯해 J 게일, H 헐버트 등 외국선교사들은 감옥에 출입하면서 전도했고 기독교 서적과 세계정세 등에 관한 책자를 넣어주었다. 선생은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기독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하고 54세의 나이에 세례를 받았다. 이는 기독교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고 선생은 이승만과 교류하면서 기독교 정신과 서양의 정치·법률제도, 만국공법과 중립외교에 기초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러·일전쟁 후 1904년 2년여 만에 출옥한 선생은 게일이 목회하는 연동교회로 출석하면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해 활동하게 된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본격적인 이권침탈에 나섰고 선생은 상소문을 통해 황무지 개간권에 반대하는 여론을 주도했다. 1905년 YMCA 교육부위원장이 되어 기독교와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계속했고 을사늑약 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 사직하자 후임 참찬을 맡아 을사 5적들과 계속 각을 세웠다. 이와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의 중심인물로 역할을 했다. 1906년 헤이그 특사와 관련한 비밀활동으로 경무청에 체포되어 수개월 감옥생활을 한 후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자 반대시위를 진두지휘했다. 1908년에는 YMCA 종교부와 교육부 총무를 맡아 기독 청년운동 최일선에 나섰다. 일제는 1911년 105인사건을 조작해 기독교 관련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는 등 YMCA를 압박·파괴하려 했으나 선생은 YMCA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1914년 각지의 YMCA를 규합해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함으로써 YMCA 자주운영의 토대를 마련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운구를 따르는 시민들의 모습. 선생의 장례는 국내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사진 독립기념관] 3·1운동 당시 선생의 노선에 대해 일제와의 직접적 대결을 피한다는 논란이 있었고 33인 민족대표 서명에 불참한 데 대한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기록은 추후 일본 정부와 직접 담판을 할 때 선생을 내세우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3·1운동 후 경찰조사를 받으며 책임을 오히려 떠안고 3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일관되게 항일 정신을 지켰다. 3·1운동 후 학교 설립과 교육진흥을 통해 애국계몽과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위해 선생은 윤치호 등과 함께 1920년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해 국민교육 진흥에 나섰다. 선생의 지도 하에 동 협회는 1920년대 교육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다. 동 협회를 중심으로 민립대학 설립이 추진되어 1923년 설립기성회 총회에서 선생이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일제의 모금방해 등으로 대학설립에 실패하고 이때 모은 기금이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에 전해졌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추대되어 일제의 감시와 통제 가운데서도 조선민중의 신문으로 자리 잡도록 이끌었다. 78세 별세 땐 첫 사회장, 62년 건국훈장 추서 한편, 선생은 1925년 기독교와 기호파 계열 인사들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흥업구락부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흥업구락부는 YMCA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독립노선을 따르는 민족진영 지도자들이 참여해 독립운동을 한 단체로 그 인맥은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들의 내분 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지지와 지원을 계속했고 해방 후 이승만의 강력한 국내 지지기반이 되었다. 선생은 1927년에 병석에 있으면서도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좌우가 합작하여 출범한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해 3월 29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장례는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져 한산 선영에 모셔졌다. 1957년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으로 천묘하고 묘비제막식을 가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소탈한 성품의 선생은 평생을 집 한 칸 없이 가난하게 살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후했고 젊은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사회운동에 매진했다. 여유와 해학, 풍자, 기지가 넘치는 언행으로 영원한 청년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선생에 대해 일제치하에서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는 데 나서거나 해외로 나가 치열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선생은 일제의 지배 하에서 결코 순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암울한 시기에 끝까지 국내에 남아 일제에 맞서 청년교육과 민족계몽운동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독립정신을 고양시켜 민족해방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일생을 바친 겨레의 스승이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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